내 고향은 네덜란드!
홀스타인은 우리나라에
언제, 왜 오게 됐을까?
한승희 캠페이너 2021. 10. 21
동물해방물결이 인천에서 구조한 소 6명은 모두 홀스타인(Holstein)이라 불리는 종(種)입니다. 홀스타인 소는 네덜란드 북부 지역의 토착종인데, 유목민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조금씩 유럽 전역으로 서식지를 넓혀나갔어요. 그래서 출신지인 네덜란드가 아닌, 독일에 있는 ‘홀스타인’이란 지역 이름이 어쩌다(?) 이들 종을 일컫는 용어가 됐고요. 홀스타인 소는 체격이 좋고 건강한 데다, 특히 여성 소의 경우 젖을 많이 만들어내요. 그러다 보니 일찍이 인간은 우유를 얻기 위해 홀스타인 소를 사육하기 시작했죠.
지난 8월, 동물해방물결이 인천 목장에서 구조한 홀스타인 남성 소 6명.
한국 최초의
홀스타인을 찾아서
바다 건너 저 멀리 유럽 땅에 살던 홀스타인 소는 언제, 왜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을까요? 옛 신문들을 열심히 뒤적이며 추적한 바로는, 개화기인 1902년 프랑스인이 우리나라로 일하러 오면서 홀스타인 여성 소 20명을 함께 데려온 게 시작이었던 것으로 보여요. 아마 우유를 얻기 위해서 소들을 데려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놀랍게도 서울 신촌(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소들을 키웠다고 하는데, 얼마지 않아 전염병이 돌아서 전부 사망했다고...
“모유 부족의 애기에게는 도라이밀크를 !!!” 이라고 외치는 1931년 모리나가 분유 광고. 동아일보
이 땅에 ‘낙농업’이라 할 만한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였어요. 일본의 큰 유업 회사들이 진출해 곳곳에 100개가 넘는 목장을 세웠거든요. 기록에 따르면 1930년 국내 거주 홀스타인 소는 93명이었고, 이듬해인 1931년에는 305명으로 1년 사이 3배 넘게 그 수가 늘었습니다.
1920년에 일본인과 독일인이 강원도(현재 북한 영토)에 세운 ‘난곡목장’. 기사에 따르면 “가로수 그늘이 더위를 잊을 만하고 그림 같은 농장 어귀에 도달하니 풀 뜯는 젖소(홀스타인종)가 주위의 풍차라든가 서양풍 외양간과 조화되어 이국 풍경을 보는 것 같다”고. (“산으로 바다로 경양특급 (25) 독일식 경농법으로 이금엔 모범농장”, 조선일보, 1938년 7월 31일자)
우리나라 정부가 주도적으로 낙농업과 축산업을 지원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들어서예요. 이때 외자를 포함한 대규모 예산을 들여 미국, 캐나다 등 해외에서 해마다 천 명 넘는 홀스타인 여성 소를 들여왔어요. 1963년에는 1억7000만원을 투입해 경기도 안성에 농협에서 직접 운영하는 60만평 규모 시범 낙농목장을 착공했고, ‘우량 종축 보급 정책’을 펼치며 꾸준히 해외에서 홀스타인 여성 소들을 데려왔습니다. 그 결과 1954년 289명에 불과했던 홀스타인 소는 1967년 1만명을 훌쩍 넘어섰고, 1971년엔 으로 2만5000명으로 크게 증가했어요.
안양의 한 개천에서 삼복더위를 식히고 있는 홀스타인 소들. “고요가 겨운 잔디밭에 누워 꿈벅꿈벅 석류빛 하늘을 쳐다보”고, “활활 달아오르는 가슴을 개울물에 축 담그고 네발 헤엄을” 치다가, 해질녘 “저녁의 메뉴로 파릇한 잡풀을 한줌 먹고 어슬렁 어슬렁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 반세기 전 이 땅에 살았던 소들의 생애는 지금보다는 자유로웠던 모양입니다. (“썸머·글래스 (1) 牛公들의 川邊놀이”, 경향신문 1961년 7월 20일자)
정부의 낙농진흥정책으로 1970년대 들어 홀스타인 여성 소의 수와 더불어 우유 생산량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한편 국내 우유 소비량은 미미했어요. 1972년 기준 국민 1인당 연간 우유 소비량은 연간 5ml로 작은 팩 우유 1개를 40명이 나눠마시는 꼴이었습니다. 매년 생산되는 우유의 10%가 재고로 남아돌았고요. 남아도는 우유 재고를 줄이기 위해 정부가 시도한 게 바로 ‘국민학교 우유급식’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우유급식 역사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죠.
“생유 소비 증대책의 하나로 아동 급유 확대도 계획되고 있다.” 경향신문 1972년 3월 3일자(왼쪽), “우유마시기 캠페인”, 조선일보 1972년 3월 1일자
그럼에도 상황이 별로 나아지지 않자, 농림부는 1972년 3월 한 달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우유 마시기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첫 일주일 동안은 트럭 3대가 시내를 돌며 시민들에게 우유 5만2000병을 공짜로 나눠주고, 유제품 전시회와 국민학교 학생 대상 우유 마시기 표어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영화 상영회도 했다는데, 과연 무슨 영화를 틀었을지 궁금하네요🤔
한편 이듬해인 1974년에는 우유 품귀현상이 벌어졌습니다. 1973년 하루 평균 20만~30만병 수준이던 우유 소비량이 80만병으로 갑자기 크게 늘었기 때문인데요. 덕분에(?) 정부는 축산업진흥정책에 더 힘을 실었습니다.
유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도 안정적으로 우유를 얻기 위해 소 20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대단위 목장을 자체 조성하기 시작했어요. 정부도 기업들에 대단위 목장을 지어 축산업에 투자하라고 은근 압박을 가했고요. 그리하여 1980년대에는 축산업에 뛰어드는 대기업이 더 늘었는데요, 축산업의 ‘기업화’에 관해선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다음에 따로 소개하도록 할게요.
삼양축산(現 삼양식품)이 1972년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등지에 조성한 ‘대관령목장’. 국내 기업목장 1세대라 할 수 있어요. (“<주간 연재> 국토의 변화 - 대관령목장”, 조선일보 1983년 11월 9일자)
그 사이 더 많은 젖과 고기를 만들어내는 ‘우량 종자’ 개량과 적은 정자로 많은 송아지를 만들어내는 인공수정 기술도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1982년 두산개발이 안면도에 세운 목장에서 홀스타인 여성 소와 샤로레이(Charolais, 프랑스 출신의 얼룩 없는 흰 소로, 주로 고기용으로 사육된다고 합니다) 여성 소에게 인공수정란을 이식해 국내 최초로 인공수정 송아지를 탄생시켰어요. 그리고 1993년엔 서울대 수의대 연구팀(2000년대에 배아줄기세포 복제 연구 논문 조작으로 물의를 빚었던 황우석 교수가 주도한…)은 도살을 앞둔 홀스타인 여성소에게서 착취한 난자를 시험관에서 배양한 다음 한우 정자와 인공수정시키고, 이를 다시 다른 홀스타인 여성 소 자궁에 이식하는 (여러 의미에서) ‘놀라운’ 실험에 성공했고요🥶
“원하는 소를 마음대로 - 수정란 이식 송아지 첫 출산”, 동아일보 1982년 12월 1일자
“시험관 송아지 국내 첫 생산”, 한겨레 1993년 11월 10일자
‘홀스타인 소는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왔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옛날신문 뒤적이기 놀이(?)는 결국 오늘날 축산업이 안고 있는 (많고 깊고 거대한) 문제들의 뿌리에 가 닿는 심각한 작업이 되어버렸습니다. 신문 기사들을 모으면서, 질문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로 바뀌었고요. 그리고 ‘동물해방물결이 만들게 될 생추어리가 문제의 근본을 때리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도 이어졌어요. ‘나아아-중에 누군가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홀스타인’을 검색했을 때, 동물해방물결이 구조한 홀스타인 남성 소 6명의 이야기와, 이들이 생애를 마감한 생추어리 이야기가 검색 결과를 꾸준히 채웠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틈 날 때마다 뉴스 라이브러리를 뒤적이고 있습니다. 홀스타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고 조만간 다시 찾아올게요👋
생활 캘린더 “젖소의 피서”, 조선일보 1973년 8월 1일자
내 고향은 네덜란드!
홀스타인은 우리나라에
언제, 왜 오게 됐을까?
한승희 캠페이너 2021. 10. 21
동물해방물결이 인천에서 구조한 소 6명은 모두 홀스타인(Holstein)이라 불리는 종(種)입니다. 홀스타인 소는 네덜란드 북부 지역의 토착종인데, 유목민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조금씩 유럽 전역으로 서식지를 넓혀나갔어요. 그래서 출신지인 네덜란드가 아닌, 독일에 있는 ‘홀스타인’이란 지역 이름이 어쩌다(?) 이들 종을 일컫는 용어가 됐고요. 홀스타인 소는 체격이 좋고 건강한 데다, 특히 여성 소의 경우 젖을 많이 만들어내요. 그러다 보니 일찍이 인간은 우유를 얻기 위해 홀스타인 소를 사육하기 시작했죠.
지난 8월, 동물해방물결이 인천 목장에서 구조한 홀스타인 남성 소 6명.
한국 최초의
홀스타인을 찾아서
바다 건너 저 멀리 유럽 땅에 살던 홀스타인 소는 언제, 왜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을까요? 옛 신문들을 열심히 뒤적이며 추적한 바로는, 개화기인 1902년 프랑스인이 우리나라로 일하러 오면서 홀스타인 여성 소 20명을 함께 데려온 게 시작이었던 것으로 보여요. 아마 우유를 얻기 위해서 소들을 데려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놀랍게도 서울 신촌(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소들을 키웠다고 하는데, 얼마지 않아 전염병이 돌아서 전부 사망했다고...
“모유 부족의 애기에게는 도라이밀크를 !!!” 이라고 외치는 1931년 모리나가 분유 광고. 동아일보
이 땅에 ‘낙농업’이라 할 만한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였어요. 일본의 큰 유업 회사들이 진출해 곳곳에 100개가 넘는 목장을 세웠거든요. 기록에 따르면 1930년 국내 거주 홀스타인 소는 93명이었고, 이듬해인 1931년에는 305명으로 1년 사이 3배 넘게 그 수가 늘었습니다.
1920년에 일본인과 독일인이 강원도(현재 북한 영토)에 세운 ‘난곡목장’. 기사에 따르면 “가로수 그늘이 더위를 잊을 만하고 그림 같은 농장 어귀에 도달하니 풀 뜯는 젖소(홀스타인종)가 주위의 풍차라든가 서양풍 외양간과 조화되어 이국 풍경을 보는 것 같다”고. (“산으로 바다로 경양특급 (25) 독일식 경농법으로 이금엔 모범농장”, 조선일보, 1938년 7월 31일자)
우리나라 정부가 주도적으로 낙농업과 축산업을 지원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들어서예요. 이때 외자를 포함한 대규모 예산을 들여 미국, 캐나다 등 해외에서 해마다 천 명 넘는 홀스타인 여성 소를 들여왔어요. 1963년에는 1억7000만원을 투입해 경기도 안성에 농협에서 직접 운영하는 60만평 규모 시범 낙농목장을 착공했고, ‘우량 종축 보급 정책’을 펼치며 꾸준히 해외에서 홀스타인 여성 소들을 데려왔습니다. 그 결과 1954년 289명에 불과했던 홀스타인 소는 1967년 1만명을 훌쩍 넘어섰고, 1971년엔 으로 2만5000명으로 크게 증가했어요.
안양의 한 개천에서 삼복더위를 식히고 있는 홀스타인 소들. “고요가 겨운 잔디밭에 누워 꿈벅꿈벅 석류빛 하늘을 쳐다보”고, “활활 달아오르는 가슴을 개울물에 축 담그고 네발 헤엄을” 치다가, 해질녘 “저녁의 메뉴로 파릇한 잡풀을 한줌 먹고 어슬렁 어슬렁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 반세기 전 이 땅에 살았던 소들의 생애는 지금보다는 자유로웠던 모양입니다. (“썸머·글래스 (1) 牛公들의 川邊놀이”, 경향신문 1961년 7월 20일자)
정부의 낙농진흥정책으로 1970년대 들어 홀스타인 여성 소의 수와 더불어 우유 생산량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한편 국내 우유 소비량은 미미했어요. 1972년 기준 국민 1인당 연간 우유 소비량은 연간 5ml로 작은 팩 우유 1개를 40명이 나눠마시는 꼴이었습니다. 매년 생산되는 우유의 10%가 재고로 남아돌았고요. 남아도는 우유 재고를 줄이기 위해 정부가 시도한 게 바로 ‘국민학교 우유급식’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우유급식 역사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죠.
“생유 소비 증대책의 하나로 아동 급유 확대도 계획되고 있다.” 경향신문 1972년 3월 3일자(왼쪽), “우유마시기 캠페인”, 조선일보 1972년 3월 1일자
그럼에도 상황이 별로 나아지지 않자, 농림부는 1972년 3월 한 달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우유 마시기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첫 일주일 동안은 트럭 3대가 시내를 돌며 시민들에게 우유 5만2000병을 공짜로 나눠주고, 유제품 전시회와 국민학교 학생 대상 우유 마시기 표어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영화 상영회도 했다는데, 과연 무슨 영화를 틀었을지 궁금하네요🤔
한편 이듬해인 1974년에는 우유 품귀현상이 벌어졌습니다. 1973년 하루 평균 20만~30만병 수준이던 우유 소비량이 80만병으로 갑자기 크게 늘었기 때문인데요. 덕분에(?) 정부는 축산업진흥정책에 더 힘을 실었습니다.
유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도 안정적으로 우유를 얻기 위해 소 20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대단위 목장을 자체 조성하기 시작했어요. 정부도 기업들에 대단위 목장을 지어 축산업에 투자하라고 은근 압박을 가했고요. 그리하여 1980년대에는 축산업에 뛰어드는 대기업이 더 늘었는데요, 축산업의 ‘기업화’에 관해선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다음에 따로 소개하도록 할게요.
삼양축산(現 삼양식품)이 1972년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등지에 조성한 ‘대관령목장’. 국내 기업목장 1세대라 할 수 있어요. (“<주간 연재> 국토의 변화 - 대관령목장”, 조선일보 1983년 11월 9일자)
그 사이 더 많은 젖과 고기를 만들어내는 ‘우량 종자’ 개량과 적은 정자로 많은 송아지를 만들어내는 인공수정 기술도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1982년 두산개발이 안면도에 세운 목장에서 홀스타인 여성 소와 샤로레이(Charolais, 프랑스 출신의 얼룩 없는 흰 소로, 주로 고기용으로 사육된다고 합니다) 여성 소에게 인공수정란을 이식해 국내 최초로 인공수정 송아지를 탄생시켰어요. 그리고 1993년엔 서울대 수의대 연구팀(2000년대에 배아줄기세포 복제 연구 논문 조작으로 물의를 빚었던 황우석 교수가 주도한…)은 도살을 앞둔 홀스타인 여성소에게서 착취한 난자를 시험관에서 배양한 다음 한우 정자와 인공수정시키고, 이를 다시 다른 홀스타인 여성 소 자궁에 이식하는 (여러 의미에서) ‘놀라운’ 실험에 성공했고요🥶
“원하는 소를 마음대로 - 수정란 이식 송아지 첫 출산”, 동아일보 1982년 12월 1일자
“시험관 송아지 국내 첫 생산”, 한겨레 1993년 11월 10일자
‘홀스타인 소는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왔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옛날신문 뒤적이기 놀이(?)는 결국 오늘날 축산업이 안고 있는 (많고 깊고 거대한) 문제들의 뿌리에 가 닿는 심각한 작업이 되어버렸습니다. 신문 기사들을 모으면서, 질문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로 바뀌었고요. 그리고 ‘동물해방물결이 만들게 될 생추어리가 문제의 근본을 때리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도 이어졌어요. ‘나아아-중에 누군가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홀스타인’을 검색했을 때, 동물해방물결이 구조한 홀스타인 남성 소 6명의 이야기와, 이들이 생애를 마감한 생추어리 이야기가 검색 결과를 꾸준히 채웠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틈 날 때마다 뉴스 라이브러리를 뒤적이고 있습니다. 홀스타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고 조만간 다시 찾아올게요👋
생활 캘린더 “젖소의 피서”, 조선일보 1973년 8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