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거니즘
인간의 진화는 끝났다?
이지연 캠페이너 2018. 09. 10
‘다윈주의(Darwinism)’만큼 사회 구조에서 재가공되는 아이디어도 없습니다. 시간에 따라 생명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인 “종의 계보(the descent of species)”를 말하고자 한 다윈이 의도했던 바는 아닙니다. 진화는, 꿀벌, 양치류, 판다가 현재 존재한다면, 항상 그래왔을 것이라는, 종은 항상 고정되어 있다는 일반 인식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그러나 ‘진화’라는 용어는 곧 느슨한 비유로 바뀌어, 과학의 규칙을 벗어났습니다. 그 비유의 가장 위험한 적용은 인간 사회를 대상으로 할 때, 즉 일상 속 개념들을 다윈주의와 그릇되게 결부시킬 때입니다. 이제 대다수 현대인은 아래의 왜곡된 주장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믿습니다:
1. 자연은 적자 생존이다. 그러므로 사회도 마찬가지다.
2. 진화는 약자를 제거하고 강자를 선호하는 피나는 경쟁을 통해 작동한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3. 당신이 약하다면, 실패할 만하다. 자연에서 종을 강화하기 위해, 생존은 무자비할 수 밖에 없다.
4. 진화론적 체계에서 빈곤은 약함의 증거다.
5. 더 낮은 종은 물리적으로 진화하지만, 초기 인간의 수준에 도달하면, 진화가 심리학, 감정 및 사회적 행동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진화 비유(the evolution metaphor)'의 가장 유해한 적용은 ‘불평등에 대한 정당화’로 나타납니다. 인종차별주의는 일부 인종이 우월할 때 다른 인종은 열등하다고, 성차별주의는 남성은 강력하며 여성은 약하다고 규정합니다. 자유 시장의 광신자들은 빈곤층, 노인 또는 아픈 사람들에게 돈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펼칩니다. 자유 경쟁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의무는 해당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으로 가면 사회진화론적 교리는 거의 모든 종류의 권력 장악이나 무자비한 경쟁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인간-비인간 동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진화적 호소는 그토록 광범위하고 강력합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호모 사피엔스가 이미 ’자연의 상태(the state of nature)’를 떠난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종의 생존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식량와 번식을 향한 경쟁 능력입니다. 식량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필요이며, 번식은 자칫하면 사라질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합니다. 그런데 지난 수천년간, 인간은 두 가지 원동력에서 의식적으로 멀어져 왔습니다.
1. 인간은 병들고, 약하고, 늙은 이들을 자연에 맡기기보다 돌본다.
2. 인간은 의학에 의존하여, 자칫하면 인구 감소로 이어질 치명적인 질병을 통제하고, 제거한다.
3. 인간에게는 지구 모든 곳으로 식량을 전달하는 경제 체계가 있다. 사람들은 직접 생산하지 않는 식량을 살 수 있다.
4. 정의의 개념은 폭력을 사용하여 타인을 해치거나 원하는 것을 훔치는 사람들을 처벌한다.
5. 인간은 신체적으로 강하든 약하든, 무기와 총알로 멀리서도 상대를 이길 수 있다.
이것들은 적자 생존이 지배하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수많은 방법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대량 살상 무기, 자살 폭탄 테러, 혹은 자살 그 자체처럼, 인간의 몇몇 탈진화적 특성들은 실로 무시무시합니다. 동시에, 자선 단체나 병원 같은 탈진화적 특성은 자연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가져오는 이득의 상징으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몇몇 진화학자는 다윈주의가 여전히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지만, 그 논쟁은 일단 제쳐둡시다. 어떻든간에 탈진화는 인간에게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동시에 미쳤고, 진화를 이용한 비유는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계속해서 진화하고 싶은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일지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요?
좀 더 깊게 들어가면, 진화 비유는 결국 ‘진보(progress)’라 할 수 있으며, 대다수의 현대인은 계속해서 진보하길 원합니다. 비록 종교적 순수성이라는 환상으로 회귀하려는 급진적 지하디스트, 똑같이 환상에 불과한 인종적 순수성을 갈망하는 백인 우월주의자, 그도 아니라면 세계화의 흐름에서 배타적인 국가를 만들겠다는 극단적 민족주의에 기대는 외국인 혐오자로 인한 퇴보의 순간들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진화 비유를 놓지 않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탈진화를 발전시켜 자연 상태에서 더 많은 자유를 얻는 데 있습니다. 이는 주로 개인적인 의식 진화로 일어나는데, 전통적 종교를 등진 사람들은 이제 더 높은 의식으로가는 길을 찾기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너무 고상하게 들린다면, 평화, 사랑, 창의력, 기쁨 및 성취에 대한 탐색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오래 전, 인간은 물리적 진화에서 정신적 진화로 나아가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도약을 이루었으며, 덕분에 빠른 뇌 발달로 언어, 도덕성, 합리적인 사고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계속해서 진화할 수 없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으며, 이를 위해 뇌의 새로운 물리적 구조가 필요하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인간 두뇌는 이미 충분히 유연합니다. 진화할지 말지는 우리의 선택이며, 의식의 새로운 영역을 탐구할지, 아니면 구식의 의식으로 후퇴할지 또한 우리 선택에 달렸습니다. 결국 다윈주의가 최고의 혹은 최악의 이론이 되는지는, 우리가 그 이론을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윈적 생명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비유로서의 진화는, 우리에게 최고 그리고 최악의 가능성 모두를 시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원문참조] Have Human Beings Stopped Evolving?, Huffington Post, Deepak Chopra
#비거니즘
인간의 진화는 끝났다?
이지연 캠페이너 2018. 09. 10
‘다윈주의(Darwinism)’만큼 사회 구조에서 재가공되는 아이디어도 없습니다. 시간에 따라 생명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인 “종의 계보(the descent of species)”를 말하고자 한 다윈이 의도했던 바는 아닙니다. 진화는, 꿀벌, 양치류, 판다가 현재 존재한다면, 항상 그래왔을 것이라는, 종은 항상 고정되어 있다는 일반 인식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그러나 ‘진화’라는 용어는 곧 느슨한 비유로 바뀌어, 과학의 규칙을 벗어났습니다. 그 비유의 가장 위험한 적용은 인간 사회를 대상으로 할 때, 즉 일상 속 개념들을 다윈주의와 그릇되게 결부시킬 때입니다. 이제 대다수 현대인은 아래의 왜곡된 주장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믿습니다:
1. 자연은 적자 생존이다. 그러므로 사회도 마찬가지다.
2. 진화는 약자를 제거하고 강자를 선호하는 피나는 경쟁을 통해 작동한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3. 당신이 약하다면, 실패할 만하다. 자연에서 종을 강화하기 위해, 생존은 무자비할 수 밖에 없다.
4. 진화론적 체계에서 빈곤은 약함의 증거다.
5. 더 낮은 종은 물리적으로 진화하지만, 초기 인간의 수준에 도달하면, 진화가 심리학, 감정 및 사회적 행동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진화 비유(the evolution metaphor)'의 가장 유해한 적용은 ‘불평등에 대한 정당화’로 나타납니다. 인종차별주의는 일부 인종이 우월할 때 다른 인종은 열등하다고, 성차별주의는 남성은 강력하며 여성은 약하다고 규정합니다. 자유 시장의 광신자들은 빈곤층, 노인 또는 아픈 사람들에게 돈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펼칩니다. 자유 경쟁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의무는 해당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으로 가면 사회진화론적 교리는 거의 모든 종류의 권력 장악이나 무자비한 경쟁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인간-비인간 동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진화적 호소는 그토록 광범위하고 강력합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호모 사피엔스가 이미 ’자연의 상태(the state of nature)’를 떠난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종의 생존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식량와 번식을 향한 경쟁 능력입니다. 식량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필요이며, 번식은 자칫하면 사라질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합니다. 그런데 지난 수천년간, 인간은 두 가지 원동력에서 의식적으로 멀어져 왔습니다.
1. 인간은 병들고, 약하고, 늙은 이들을 자연에 맡기기보다 돌본다.
2. 인간은 의학에 의존하여, 자칫하면 인구 감소로 이어질 치명적인 질병을 통제하고, 제거한다.
3. 인간에게는 지구 모든 곳으로 식량을 전달하는 경제 체계가 있다. 사람들은 직접 생산하지 않는 식량을 살 수 있다.
4. 정의의 개념은 폭력을 사용하여 타인을 해치거나 원하는 것을 훔치는 사람들을 처벌한다.
5. 인간은 신체적으로 강하든 약하든, 무기와 총알로 멀리서도 상대를 이길 수 있다.
이것들은 적자 생존이 지배하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수많은 방법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대량 살상 무기, 자살 폭탄 테러, 혹은 자살 그 자체처럼, 인간의 몇몇 탈진화적 특성들은 실로 무시무시합니다. 동시에, 자선 단체나 병원 같은 탈진화적 특성은 자연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가져오는 이득의 상징으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몇몇 진화학자는 다윈주의가 여전히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지만, 그 논쟁은 일단 제쳐둡시다. 어떻든간에 탈진화는 인간에게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동시에 미쳤고, 진화를 이용한 비유는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계속해서 진화하고 싶은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일지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요?
좀 더 깊게 들어가면, 진화 비유는 결국 ‘진보(progress)’라 할 수 있으며, 대다수의 현대인은 계속해서 진보하길 원합니다. 비록 종교적 순수성이라는 환상으로 회귀하려는 급진적 지하디스트, 똑같이 환상에 불과한 인종적 순수성을 갈망하는 백인 우월주의자, 그도 아니라면 세계화의 흐름에서 배타적인 국가를 만들겠다는 극단적 민족주의에 기대는 외국인 혐오자로 인한 퇴보의 순간들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진화 비유를 놓지 않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탈진화를 발전시켜 자연 상태에서 더 많은 자유를 얻는 데 있습니다. 이는 주로 개인적인 의식 진화로 일어나는데, 전통적 종교를 등진 사람들은 이제 더 높은 의식으로가는 길을 찾기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너무 고상하게 들린다면, 평화, 사랑, 창의력, 기쁨 및 성취에 대한 탐색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오래 전, 인간은 물리적 진화에서 정신적 진화로 나아가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도약을 이루었으며, 덕분에 빠른 뇌 발달로 언어, 도덕성, 합리적인 사고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계속해서 진화할 수 없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으며, 이를 위해 뇌의 새로운 물리적 구조가 필요하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인간 두뇌는 이미 충분히 유연합니다. 진화할지 말지는 우리의 선택이며, 의식의 새로운 영역을 탐구할지, 아니면 구식의 의식으로 후퇴할지 또한 우리 선택에 달렸습니다. 결국 다윈주의가 최고의 혹은 최악의 이론이 되는지는, 우리가 그 이론을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윈적 생명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비유로서의 진화는, 우리에게 최고 그리고 최악의 가능성 모두를 시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원문참조] Have Human Beings Stopped Evolving?, Huffington Post, Deepak Chop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