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 EN
철학
홈 > 소개 > 철학
현재 반려, 전시, 농장, 실험 등의 영역에 속하여 이용되는 동물도, 대중적,

사회적 인식이 변한다면 얼마든지 해방되어 그 삶을 달리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그 선례가 충분히 있습니다.
한때 식용(웅담 채취용)으로 사육,
도축되었으나
이제는 온전한 야생동물로 해방 되어 국가가 ​보호
하는 ​
반달가슴곰.
한때는 ​수족관 ​전시용이었으나, ​이제는 ​해방되어 ​
제주도 ​앞바다를 ​마음껏 ​누비고 ​있는 제주 ​
남방큰돌고래 ​제돌,
춘삼, ​삼팔, ​태산 ​그리고 ​복순.
문제는 그들이 사고를 할 수 있는가?



말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다.


- 제레미 벤담(철학자) -
정의란
동등한 것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며, 도덕적 평등은 결국
‘우월성 또는 특별함’이 아닌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공통점에 기인합니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 과연 동등할까요?

발달된 지능과 언어 능력으로 도덕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분명, 특별합니다.

인간은 분명 동물 중에서도, 고도로 발달한 지능, 언어, 사회성을 갖춘
특별하고
신기한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이 ‘모든 면에서’
다른 동물보다 우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진화 과정을 거쳐온 동물 종들은 저마다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돌고래는 발달된 청각으로 우리가 듣지 못하는
초음파를 들을 수 있고, 치타는
발달된 운동신경으로 우리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과 비인간 동물이 진정으로 똑같지는 않으며,
이는 동물해방 운동에서도
주장하는 바가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서
우리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능력에 따르는 ‘권리’
(투표권, 집회권, 종교적 자유 등)는 다른 동물에게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상적인 인간-동물 관계에서 유의미한 평등은 무엇일까요?

인간과 비인간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면에서
동등합니다.

인간과 동물은 발달된 신경계로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동등합니다.

우리가 아픔, 스트레스, 우울, 통증 등 다양한 추상적 언어로 말하는 ‘고통’은 결국 외부 자극을
신경계(말초신경, 척수, 뇌)를 통해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통을 언어
뿐 아니라 신음, 비명, 찌푸리는 표정 등으로 표현하지요.

종별로 다양한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비인간 동물 역시 생물학적으로
비슷하게 발달된
신경계로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언어가 아니더라도
우리와 비슷한 소리와 행동을 통해
이를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지 오래입니다. 주변에서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은 후 움찔하며
도망가려는 동물을 보면, 굳이 과학도서를 찾아 읽지 않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동물이 인간과 똑같은 생물학적 원리로 고통을 느낀다면,
우리가 ‘특별한’ 인간이라
하여 이들에게 마음껏 고통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그럴 권리가
있을까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동물해방 운동의 시작을 알린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해요!
동물해방
1.
우리는 흑인 해방, 게이 해방 및 기타 여러 운동들에는 익숙하다. 몇몇은 여성 해방과 함께 우리가 이 길의 끝에 왔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인종 차별로부터 자유롭다고 오랫동안 스스로 자부해온 자유주의 집단들 속에서도, 성차별이야말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변명없이 행해지는 마지막 차별 형태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 남은 차별 형태”를 논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동안 해방 운동들로부터 우리가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하는 방식을 의식하는 것이, 누군가 그것을 강력히 지적해주기 전까지는 얼마나 어려운가이다. 해방 운동은 우리의 도덕적 시야 확장을 요함으로써, 여태껏 자연스럽고 불가피하게 여겼던 관행들을 이제는 견딜 수 없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

아마 독자는 회의적일 것이다. “동물 해방”은 진지한 목표라기보다 해방 운동들의 패러디처럼 들린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흑인 및 여성이 실제로 백인 및 남성과 동등하기 때문에 흑인 및 여성의 평등을 지지한다. 지능과 능력 면에서, 지도력, 합리성 면에서 동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과 비인간은 이러한 면에서 당연히 동등하지 않다. 정의란 동등한 것들을 공평하게 대할 것만을 요하기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의 차별 대우는 불공평할 수 없다.



이는 끌리는 답변이지만, 위험한 답변이기도 하다. 이는 비인종차별주의자와 비성차별주의자로 하여금 흑인 및 여성이 실제로 백인 및 남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똑같은 지능과 능력 등을 가졌다는 독단적 입장에 서도록 한다.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도 크다. 분명 이러한 면들에서의 인종적, 성적 차이들이 유전적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은 확정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평등을 위한 우리의 주장을 인종과 성별 간에 이러한 종류의 유전적 차이가 없다는 가정에 걸고 싶은가? 틀림없이, 그러한 유전적 차이의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그 반대 증거가 무엇이건 간에, 차이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평등에 대한 주장이 IQ에 의존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개인으로서, 지능 및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능력에 있어서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인간 평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우월한 지능을 갖는 것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인간을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이것이 인간들로 하여금 비인간들을 착취할 권리를 주겠는가?

제레미 벤담은 평등의 본질적인 기반을 다음과 같은 자신의 유명한 공식으로 표현했다. “각각 하나로 치고 아무 것도 여럿으로 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이익을 갖는 모든 존재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고, 다른 모든 존재의 비슷한 이익과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 벤담 이전과 이후의 도덕 철학자들도 같은 주장을 다른 방식으로 해왔다. 다른 존재들을 위한 우리의 관심은 그들이 특정 성질을 가졌는가에 달려서는 아니된다. 그 관심이 정확히 무엇을 수반하는지는, 물론, 이러한 특성에 따라 다를 테지만 말이다.

벤담은 인종 평등 주장의 논리가 인간 평등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폭정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고서야 절대 보류될 수 없었던 그 권리들을 나머지 동물들도 얻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프랑스인들은 이미 피부가 검다는 것이 한 인간이 다른 이의 변덕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도 아무런 구제를 받지 못하도록 내버려져야 할 이유가 아님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다리 개수, 털의 양, 엉치뼈 말단 등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하여금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이유가 되기에 마찬가지로 부족함이 인정될 날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을 것인가? 이성 능력인가, 어쩌면 담화 능력인가? 그러나 다 자란 말이나 개가 하루 내지 일주일, 심지어 한 달 된 아기보다 더 합리적이며 대화가능한 동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치자. 그게 소용이 있을까? 문제는 그들이 사고를 할 수 있는가? 말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다.”



벤담이 분명 옳았다. 만약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 고통을 고려하고, (대략적인 비교가 가능하다면) 다른 존재들의 비슷한 고통과 동등하게 간주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로지 이것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고통을 느끼는가? 대부분 사람들은 고양이와 개 같은 동물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실제로 느낀다고 주저없이 동의하며, 이것은 이러한 동물들에 대한 불필요한 학대를 금지하는 법들이 가정하는 바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으며 몇몇 사람들이 갖고 있는 듯한 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워낙 근본적인 사항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동물들도 고통을 느낀다고 여기는 데 어떠한 근거가 있는지 따져볼 가치가 있다.



우선 인간 개인이 다른 인간들도 고통을 느낀다고 가정하는 데에는 어떤 근거가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 가장 좋다. 고통이란 일종의 의식 상태, “정신적 사건”이기 때문에 절대로 직접 관찰될 수 없다. 어떠한 관찰도, 몸부림 또는 비명과 같은 행동적 신호들 또는 생리학적, 신경학적 기록들도 고통 자체의 관찰은 아니다. 고통은 느끼는 것이고, 우리는 다른 이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다양한 외적 표시들을 통해서 추론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오직 철학자들만이 다른 인간들도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간의 경우에는 이러한 추론을 합당하게 여김을 보여준다.

똑같은 추론이 다른 동물들한테는 합당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다른 인간들 속의 고통을 추론하게 하는 거의 모든 외적 신호들을 다른 종들, 특히 포유류 및 조류와 같은 “고등” 동물들에게도 볼 수 있다. 행동적 신호들—몸부림, 캥캥 짖는 소리, 또는 다른 형태의 울음 소리, 고통을 피하려는 시도, 기타 등등—이 존재한다. 우리는 또 연관된 여러 면들에서 이러한 동물들이 생물학적으로 유사하다는 것, 우리와 비슷한 신경 체계를 갖고 그것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포유류 및 조류가 고통을 느낀다고 믿을만한 근거들은 우리가 다른 인간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는 근거과 매우 유사하다. 남은 것은 이러한 유사성이 진화론적인 단계에서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따져보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인간으로부터 멀어질 수록 희미해진다. 더 정확하려면 우리가 다른 생명체들에 관해 아는 모든 것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어류, 파충류 및 기타 척추동물과는 이 유사성이 여전히 강해보이고, 조개와 같은 연체 동물과는 훨씬 약해보인다. 곤충은 더 어렵고, 우리의 현재 지식 상태로는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해 불가지론적이어야 할 수도 있다.

요점은 이 문제에 관해서 진정으로 객관적인 비판론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매일 도축된 비인간들의 살점을 먹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한다. 그리고 먹을 수 있는 다른 게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따라서 비인간을 도덕의 울타리 밖에 두지 않는 이들은 더 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해보이는 단계, 상대방의 위선을 비난하고 우리의 관습 및 그 관습을 옹호하는 방식에 관한 일종의 사회학적 설명을 찾는 단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 반대로, 그 주장에 설득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식습관 및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사회학적 설명이 모욕적으로 거만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2.
종차별주의 논리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비인간에게 실험하는 관행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비인간이 인간과 너무 달라서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은폐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생체 해부 옹호자는 인간과 다른 동물 간의 유사성을 강조함으로써 전자에게 후자에 대한 실험의 유용성을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에 이 주장을 쓸 수 없다. 쥐들로 하여금 배고픔과 전기 충격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만들어서 쥐들에게 궤양이 생기는지 (생긴다) 알아보려는 실험자는 쥐가 인간과 매우 유사한 신경 체계를 갖고 있으며, 아마 유사한 방식으로 전기 충격을 느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러한 실험들이 이 나라 전역의 대학 캠퍼스들 위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학생 운동으로부터 일말의 저항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관행이 얼마나 용인되고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증거다. 학생들은 자신의 대학이 인종이나 성별에 따라 차별해서는 아니되며, 군대나 대기업의 목적에 봉사해서는 아니된다고 정당하게 우려해왔다. 그러나 종차별주의는 그대로 지속되며, 많은 학생들이 이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조금 양심의 가책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이가 정상으로, 심지어는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학생은 곧 무감각해지고, 이전의 느낌을 “감정 따위”로 치부하면서, 동물들을 우리가 마땅히 고려해주어야 할 이익을 갖는, 느끼는 존재가 아닌 통계 수치로 여기게 된다.

생체 해부에 관한 논쟁은 여태껏 절대론적인 말들로 이뤄졌기 때문에 요점에서 벗어났다. 폐지론자는 하나의 동물에 실험함으로써 살릴 수 있는 수천명을 죽게 내버려둘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렇듯 순전히 가정적인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또 다른 가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실험자는 만약 그것이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육개월 미만의 인간 고아에게 실험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나는 부모 감정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고아”라고 한정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나는 실험자에게 지나치게 공평하게 구는 것이다. 비인간 실험 대상들은 고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부정적 대답은 비인간을 이용하는 실험자의 자세가 단순한 차별임을 나타낸다. 유인원, 고양이, 쥐 등 다른 포유류의 성체들은 인간 유아에 비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더 의식하며, 더 자발적이고,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비슷한 정도로 고통에 민감하다. 인간 유아가 갖는 특성 중 포유류 성체가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갖지 않는 것은 없다.



실험자는, 즉, 같거나 더 낮은 정도의 감각, 의식, 자발성을 갖은 인간을 이용하는 게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목적을 위해 비인간을 이용해 실험할 때마다 자기 종 중심적인 편견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들의 결과에 익숙한 사람은 이 편견이 제거되었을 경우 이행될 실험의 숫자가 전무 또는 그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에 한치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3.


공장식 축산 농장의 동물들은 가장 문자 그대로의 해방을 요한다. 식육용 송아지들은 5 피트 x 2 피트 우리에 갇혀 지낸다. 그들은 주로 사개월 정도 되었을 때, 최소 한달 이상은 너무 커서 우리 안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도축된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이에 비해서만 더 큰 우리에 갇혀 지내는 집약적 소고기 무리들이 소고기 생산에서 증가하는 비율을 차지한다. 암퇘지들은 주로 임신되었을 때 비슷하게 감금당하는데, 이는 번식력을 키우는 인공 방식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감금당한 동물들은 운동으로 음식을 낭비하지 않으며, 맛없는 근육을 발달시키지도 않는다.



공장식 축산품을 구매함으로써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에 대해 들어보았지만, 스스로 불편해질까봐 두려워 확인 해보기를 꺼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비종차별주의자에게 전형적인 소비자의 무지, 진실 회피, 진정 악한 일이 허용될 리가 없다는 애매한 믿음의 조합은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착한 독일인들”의 태도와 유사해 보인다.



공장식 축산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들에 대한 부당한 수준의 착취를 수반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인도적”으로만 한다면 식용으로 동물을 키우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는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아니되지만, 그들을 죽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태도들의 조합이 불합리함을 보이는 것이다 … 안락사가 논란거리인 이유는 오직 우리가 삶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지 않았다면, 약간의 고통도 안락사를 정당화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동물의 목숨을 빼앗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물의 삶에 우리가 어떠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두번째 답변은 우리가 인간이 단순히 고기를 좋아하는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비인간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비인간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은 이 개념에 대한 기술의 적용일 뿐이다. 전통적인 방식들조차 거세, 어미와 새끼의 분리, 무리의 해체, 낙인 또는 귀 뚫기, 그리고 당연히 도살장으로의 운송과 피 냄새를 맡고 위험을 감지했을 때 느끼는 최후의 공포를 수반한다. 동물들이 고통 없이 살고 죽도록 기르고자 노력한다면, 오늘날 육류 업계의 크기를 유지하기란 완전 불가능할 것이다. 고기는 가진 자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음식과 실험 목적을 위한 다른 종들의 착취에 비해서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사항들이기 때문에 나는 다루지 않았다 … 이 글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비인간에게 갖는 태도가 인종차별주의 또는 성차별주의 만큼 문제 있는 편견의 형태임을 인정하도록 하는 도전이다. 이는 우리에게 채식주의자가 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단순한 태도의 변화가 아닌, 우리 삶의 방식의 변화를 요한다.

이런 종류의 순수한 도덕적 주장이 성공할 수 있을까? 분명 가능성은 적다 … 우리가 동물 착취를 멈추면 우리가 더 건강해질 것이라, 삶을 더 즐길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동물 해방은 다른 어떤 해방 운동보다도 인류 입장에서 더 큰 이타주의를 요구할 것이다. 동물은 스스로 해방을 요구하거나, 투표, 시위, 폭탄 등으로 착취에 저항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토록 진정한 이타주의가 가능할까? 누가 아는가?
그러나 만약 이 글이 상당한 효과를 갖는다면, 이는 인간이 그 속에 잔인함과 이기심 이상의 잠재력을 가졌다고 믿었던 모든 이들의 승리가 될 것이다.
Peter Singer, 1973년 4월 5일
​동물해방물결​ ​발췌​ ​및​ ​옮김